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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권문세족과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 등장
    한국사 2024. 4. 9. 08:00

    13세기 당시 중국대륙의 정세는 급속히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금이 약해진 틈을 타 거란족이 대요수국을, 여진이 동진국을 세웠습니다. 오랫동안 부족 단위로 유목생활을 해오던 몽골족을 칭기즈칸이 통일하고 국가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때 금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거란족 일부가 몽골군에 쫓겨 고려를 침입하였으나, 김취려가 반격하여 물러갔습니다. 다시 침입해 온 거란을 몽골과 연합하여 강동성에서 거란을 물리쳤습니다. 이를 계기로 몽골은 거란족을 몰아낸 은인이라고 주장하며 해마다 많은 공물을 요구하였습니다.

     

    고려의 대외관계

     

     

    고려의 대외관계와 권문세족 및 고려 후기 신진사대부의 등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와 몽골의 대외관계

    고려와 몽골의 대외관계는 우호적이지 않았습니다. 고려에 있던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 도중 국경에서 거란족에게 봉변을 당하자 이를 빌미 삼아 몽골군이 고려와 적대적인 관계로 변화하였습니다.

    몽골군이 의주를 점령하였으나 의주 공략에 애를 먹은 몽골군이 귀주성에서 박서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방향을 바꾸어 개경을 포위함으로써 몽골군은 큰 소득도 없이 철수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최우는 몽골의 무리한 조공 요구와 간섭에 대응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항몽 태세를 준비하였습니다. 그 후 처인성 전투에서 뭉골군을 김윤후가 이끄는 군대가 물리쳤습니다. 이후 고려는 7차례의 지속적인 몽골군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국토가 황폐해지고, 백성들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는 등 전국적으로 피해가 극심하였습니다.

    고려의 지배층은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여 국난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일반 민중, 천민, 노비 등도 힘을 모아 몽골의 침입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였습니다. 이때 대장경, 속장경, 황룡사 9층탑 등의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습니다.

     

    점차 세력을 회복하기 시작한 문신들은 몽골과의 강화를 주장하면서 무인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몽골과 강화하려던 주화파와 일부 무신들이 결탁하여 최씨 무신정권의 최씨 정권은 몰락하게 되었습니다. 1270년에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고려와 몽골은 강화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원 간섭기에 나타난 고려의 변화

    고려는 원나라와의 강화 이후 원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는 원 간섭기에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왕이 몽골 공주와 결혼하게 되면서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게 되고, 자주국에서 제후국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왕 이름 앞에 '충'을 붙여 몽골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였으며, 각종 왕실의 용어를 한 단계 낮춰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원 간섭기에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할 목적으로 설치한 정동행성을 고려에 대한 내정간섭기구로 사용하여 고려를 직접적, 간접적으로 간섭하면서 지배하려 하였고, 고려 영토의 일부를 강탈하여 직속령으로 삼았으며 동녕부, 탐라총관부, 쌍성총관부를 설치하였습니다. 고려에서는 몽골식 의복이나 변발 등의 몽골풍이 유행하였고, 몽골에서도 고려 풍습이 전해지면서 고려양이 유행하였습니다. 원의 고려에 대한 경제적 수탈로써 공녀와 특산물의 징발 등은 농민들에게 고통을 가중시켰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인해 지배층의 문란이 발생하였고 새로운 지배세력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권문세족의 등장

    고려의 권문세족은 기존 문벌귀족 중 무신정변 과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일부 무신 세력들 그리고 원과의 친분을 통해 관직에 진출한 부원 세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권문세족은 주로 몽골과 친분이 있던 군인, 역관, 환관 출신들이 많았으며 원의 세력에 기대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백성들을 억압하고 땅을 빼앗아 농장을 만들어 부를 점차 확대하였습니다. 농장의 확대로 일반 농민이 노비로 전락하면서 조세 수입이 감소하게 되자 국가재정은 점차 궁핍해졌습니다. 이로서 국가 통치질서를 위협하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려 후기의 개혁정치와 신진사대부의 등장

    14세기 중반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되고 새로운 중국의 왕조인 명이 부상하였습니다. 권문세족의 횡포로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공민왕은 반원정책으로 원의 간섭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정동행성을 폐지하고, 원 간섭 이전의 상태로 관제를 복구하였으며, 쌍성총관부 지역을 탈환하는 등 영토를 수복하게 되었습니다.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는데,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력이 불법으로 차지한 농장을 일반 양인에게 돌려주고, 불법적으로 농장에 소속된 노비를 해방시켰습니다. 그러나 권문세족의 반발과 개혁을 추진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신진사대부의 미약한 세력, 공민왕과 신돈의 제거 등으로 인해 개혁은 실패로 끝나게 되고 권력은 다시 권문세력으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왜구의 침탈이 확산되었는데 해안지역에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면서 조세의 해상운송을 어렵게 함으로써 국가 재정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최무선, 최영, 이성계 등이 왜구를 격퇴하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왜구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후 1388년 우왕 14년에 명나라가 원을 멸망시켜 가는 과정에서 철령 이북의 영토를 요구하자 고려는 명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최영의 주도 아래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으나, 이성계가 사불가론을 내세우며 반대하였습니다. 이성계의 의견을 묵살하고 최영이 요동정벌 계획을 실행하자, 이성계와 조민수가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하류의 위화도에서 군대를 돌려 개경을 공격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위시키면서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신진사대부의 집권과 고려의 멸망

    이성계가 정권을 장악하자 고려의 정치개혁 방향에 따른 입장 차이로 신진사대부 세력이 온건파와 급진파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이성계는 급진파 신진사대부와 결탁하여 반대세력인 권문세족과 온건파 신진사대부를 제거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당시 권문세족의 횡포로 지나치게 확대된 농장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토지의 개량에 착수하여 종래의 토지대장을 불태워 개혁의 토대를 마련하였으며, 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을 실시하여 권문세력이 가진 농장을 없애고, 자신의 측근 및 관료들에게 과전을 지급하여 관료층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해 주게 되었습니다.
    모든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이듬해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을 축출하고 왕이 되면서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개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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