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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대 국가의 특징과 삼국 시대의 성립과정한국사 2024. 4. 9. 00:09
한국의 고대 국가는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전 900년까지로, 원삼국 시대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합쳐지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삼국시대에서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한국의 고대 국가의 특징과 삼국 시대의 성립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의 고대 국가의 특징
한국의 고대 국가의 특징은 이전의 지방분권적 성격에서 벗어나 중앙집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전 초기국가에서의 대가들이나 군장들이 중앙의 귀족으로 편입되었으며, 왕위의 계승에서도 이전의 왕위의 선출에서 왕위의 부자 상속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또는 고대 국가는 중앙집권의 강화에 따른 영토 확장을 이루는 특징이 있습니다.
고대 국가 삼국 시대의 성립 과정
고대 국가의 삼국 시대의 성립과정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연맹은 각각 그들만의 건국 신화를 가지고 있으며, 정확한 시작은 알 수 없지만 기원전 1세기부터 주변 작은 나라들을 흡수함으로써 강해졌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고조선 공동체 밖에서 독립적으로 설립되었고, 4세기 중반까지 협상이나 교섭 없이 상당한 기간 동안 각자 발전하였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562년 가야가 멸망한 이후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그전에는 사국시대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삼국 시대 중 고구려
삼국 시대 중 고구려는 기원전 37년부터 서기 668년까지 시작된 고대 국가입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 일대를 지배했습니다. 고구려의 역사는 기원전 3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무리가 압록강 지류인 훈강 유역에 설립한 나라입니다. 2대 유리왕 때 졸본 지역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하였습니다.
1세기 태조왕 때에는 왕권강화로 중앙집권체제가 진전되었으며, 옥저와 동예를 비롯한 주변 지역의 활발한 통합을 바탕으로 영토를 점차 넓혀나가게 되었습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은 부족적 성격의 5부를 행정적 성격의 5개 지구로 구분하여 행정 구역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습니다.
3세기 동천왕은 국경을 접한 공손씨의 견제를 위해 중국의 위나라와 친교를 맺었으며, 위가 공손씨를 복속시킨 이후 오나라와 함께 위나라를 견제하였습니다. 서안평을 공격하였으나 위의 관구검에게 역습 당해 환도성이 함락되었고, 동해안까지 피신하는 위기를 맞았습니다.
4세기 미천왕은 서안평을 점령하고, 대동강 유역의 낙랑군을 완전히 축출하여 남쪽으로 진출하게 되었으며,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습니다. 고국원왕 때 백재 근초고왕의 공격으로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국원왕이 전사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였지만, 소수림왕이 태학을 설립하고 불교를 공인하고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하면서 다시 나라를 일으켰습니다.
5세기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수도를 포함하여 남쪽으로 임진강과 한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또 북쪽으로 요동을 차지하였으며 요서의 일부지방까지 도달하였으며, 여진족인 숙신과 거란이 세운 비려와 동부여까지 복속시킴으로써 만주와 한반도에서 세력을 강화하였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새외 민족과도 통교하여 외교를 확장하여 중국을 견제하였습니다. 427년에 남진정책의 일환으로 중앙집권적인 정치조직을 정비하기 위해 수도를 평양으로 이전했습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정복하였습니다.6세기 중반 대내외적인 변화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 동맹을 통해 한강 유역과 함경도 지역을 차지하였습니다.
고구려는 지속적인 중국과의 관계에서 국력이 많이 쇠퇴해졌고, 연개소문 사후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지도층이 분열되면서 정치적 혼란과 백성들의 민심이 사악해졌습니다.
결국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하였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건설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를 신라에 편입시켰습니다.
고구려 멸망 이후 한성(검모잠), 금마저(안승), 오골성(고연무)을 근거지로 삼아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의 회유와 이주정책으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삼국 시대 중 백제
백제는 기원 전 18년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서 창건한 것으로 <삼국지>에서는 백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전해졌습니다.
3세기 고이왕 때 영토 확장과 통치조직이 정비되었고, 한성을 중심으로 한군현과 항쟁을 통해 한강 유역을 통합하였습니다. 북쪽으로의 확장은 고구려와 중국의 군현 사이에 영토 분쟁을 야기하기도 했습니다.
4세기 근고고왕은 고구려를 공격하여 황해도 일대를 장악하고 마한의 전 지역을 확보하여 전라도의 남은 세력을 병합하여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도 고구려의 계속되는 압박으로 인해 한강유역을 빼앗기게 됩니다.
침체된 백제는 무령왕 때 중흥정책으로 부여를 계승하여 국가의 호칭을 남부여라고 짓고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성으로 천도하게 되었습니다. 성왕은 신라와 합세해 한강유역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를 공격하여 한강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모두 헛되이 되고 본인도 전사하였습니다.
그 후 의자왕과 무왕은 백제부흥을 위해 노력했지만, 지배층의 내분으로 실패로 끝났습니다.삼국 시대 중 신라
신라는 기원전 57년경 경주지역에 설립되었습니다. 신라는 삼국 가운데 최초로 세워진 국가였으나 국가의 구조를 세우는 데는 가장 늦었습니다. 초기에는 박씨, 석씨, 김씨 세 가문이 차례로 그 왕좌를 차지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집단의 지도자는 이사금(군주)으로 선출되었고, 주요 집단은 그들의 권력 기반을 유지하였습니다.
4세기 이사금 때의 신라는 활발한 정복활동을 벌여 진한 지역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왕위 계승권은 김씨에 의해 정립되었습니다.
지증왕 때에는 신라로 국명을 바꾸고 왕호를 마립간에서 왕으로 바꾸는 등 정치 제도가 정비되었습니다. 전국적 지방제도인 주∙군제도를 실시하고 관리를 파견하였습니다. 우산국을 정벌하기도 했습니다.
법흥왕은 율령 반포, 17 관등제 정비, 공복 제정, 병부 설치 및 골품제 정비, 귀족의 대표기구로 상대등을 설치하여 통치질서를 확립하였습니다. 이처럼 신라는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완성하였습니다.
진흥왕 때에는 내부 결속력을 다지고 적극적으로 정복 활동을 함으로써 삼국 간의 싸움을 주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통치하에 있던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함경도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562년 대가야를 함락하여 낙동강의 서쪽을 차지하였습니다 다. 한강 유역을 장악함으로써 경제적인 기반을 다지고 전략적 기반을 확보하여 황해를 통해 중국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7세기에 이르러 당과 동맹을 맺고 660년 백제를,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게다가 당나라 군대는 쫓아내고 대동강 남쪽에서 원산만까지 이르는 지역을 점령하여 삼국 통일을 이루게 되었습니다.가야 연맹
가야 연맹은 한반도의 남쪽에 위치한 부족 국가들의 연맹체입니다.
2세기 이후 여러 정치집단이 형성되었고, 3세기경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연맹왕국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으나 백제와 신라에 밀려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가야가 멸망한 원인으로 지적되는 것은 삼국과 달리 제대로 된 국가가 만들어지지 않고 부족국가연합에 그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야는 김해에서 생산된 고품질의 철을 바탕으로 국력을 발전시켜 일본과 교역하기도 하였습니다. 토기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일본의 스에키 토기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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