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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 후삼국 시대의 건립과 통일과정
    한국사 2024. 4. 9. 03:00

    중세 후삼국 시대는 892년부터 936년까지의 시기에 해당합니다.

    신라말기에 소수 귀족들에게 권력이 집중되면서 왕권 약화 및 진골 귀족들 간의 분쟁이 나타났습니다. 지속적인 왕위 권력 다툼으로 왕권이 흔들리고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도 약해지면서 지방 호적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지방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호족들은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면서 후삼국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후삼국이란 과도기를 지나가면서, 10세기 고려 왕조가 건국되고 고려 태조는 왕권 강화를 위하여 호적들을 경계하는 정책들을 펼치게 됩니다.

    신라의 비장 견훤이 남서부의 무진주를 점령하고 한남군 개국공을 명칭한 892년에서부터 고려 왕건이 백제를 포함시킨 시기인 936년까지의 시기를 후삼국 시대라고 합니다. 

    후삼국 시대의 건립과 후삼국의 통일과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민란의 발생 원인

    민란의 발생 원인은 국가의 재정 위기를 극복하고자 지방 주와 군에 조세 납부를 촉구하게 되었는데, 이는 결국 농민들에게 이중 조제 부담을 강요하게 되면서 일어났습니다.

    지방의 성주와 호족의 수장은 신라의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약화시켰고, 수취 제도도 점차 느슨해졌습니다. 또한 신라 후기에 이르러 귀족들의 사치와 향유가 증가함에 따라 그 비용도 점점 증가하였는데, 이것을 충족시킬 재원은 반대로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이러한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부는 농민에게 무거운 세금과 역역에 부담하게 하였습니다. 이에 부담을 느낀 농민들은 도적 혹은 유민이 되어 사회 질서를 어지럽혔습니다. 그러나 이런 새로운 질서는 금성(경주)을 중심으로 한 신라의 옛 질서에 대한 반격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조세에 대한 독촉은 농민층을 더욱더 자극시키게 되어 민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민란의 발생을 틈타 호족들은 세력을 확장하고 민중들은 도적의 무리로 점차 변해갔습니다.

     

    후삼국 시대의 건립 과정 중 후백제의 건국(900)

    후백제의 건국은 상주 출신의 군관이었던 견훤이 건국하였습니다. 황해도 일대의 해상세력 및 도적들과 연합하여 자립하였으며, 금성(나주)에서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충청도와 전라도를 점령하였습니다. 중국과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였으나, 신라와는 적대적이었기에 신라를 침공하여 경애왕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을 즉위시켰습니다. 농민에게 가혹하게 조세를 수위 하였으며, 호적을 포섭하는 데에는 실패하였습니다.

     

     

    후삼국의 시대의 건립 과정 중 후고구려의 건국(901)

    후고구려는 신라 왕족 출신인 궁예가 건국한 나라입니다. 중부 지역의 호족을 흡수하고, 특히 송악 출신의 왕건 부자를 자기 세력으로 포합하는데 성공합니다. 초기에는 양길의 부하였으나 자립한 이후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마진에서 태봉으로 국호를 변경하고, 골품제를 폐지, 광평성 등 9 관등제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속되는 전쟁과 과중한 조세 징수, 관료 장군 실패, 미륵신앙 신봉 등의 이유로 궁예는 민심을 잃게 됩니다.

     

     

    후백제와 궁예(태봉)의 세력확장

    901년 후백제 경훤왕이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매우 견고하여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금성의 남쪽으로 옮겼습니다. 그러나 903년에는 왕건의 해군 기습으로 금성(나주)의 10여 개 군과 현을 빼앗기기도 하였습니다. 또 906년에는 상주 사화진 지역에서 왕건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였습니다. 백제는 패전의 설욕을 만회하기 위해 군을 개편한 후 907년에 일선군 이남의 10여 성 전부를 점령하였습니다. 경훤이 직접 보병과 기병 3,000명을 이끌고 서해 해상 전력 회복을 위해 나주성을 포위하고 열흘간 지키고 있었습니다. 결국 궁예가 병사들의 군대를 투입하여 공격하자 경훤이 군대를 이끌고 물러갔습니다.
    양길 세력을 흡수하며 나주를 획득 및 삼한의 절반을 점령한 궁예는 점차 세력확장을 위하여 903년 철원과 부용에 도착하여 산수를 살피는 등 도읍을 옮기고자 하였습니다. 904년에는 여러 관직이 설치되었고, 일부 관청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신라의 제도를 따랐습니다. 이때의 국명은 '후고구려'에서 '마진'이라고 하고, 연호를 무태 월년이라 하였습니다. 905년에 마침내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게 되면서 세력확장은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궁예는 군대를 동원하여 죽령 북동쪽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반대로 신라는 땅이 갈수록 좁아진다는 소식을 듣고 근심이 매우 컸지만, 무력하여 이를 막을 수 없었기에 여러 성주에게 나서서 맞서 싸우지 말고 성벽을 잘 지키라고 명령했습니다.

     

     

    고려와 후백제의 경쟁의 결과

    궁예는 911년 국호를 태봉으로 바꾸고 연호도 수덕만세로 바꿨습니다. 궁예는 왕권 강화를 꿈꾸었지만, 호족들의 반대로 내분이 깊어졌습니다. 궁예는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겼고, 고구려와 무관한 국호를 자주 변경하여 왕권 강화 조치를 시행했습니다. 또한, 그는 주변 사람들을 의심하고 왕권을 위협하는 호족들을 응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신하들의 반발은 거세졌고 민심은 점차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시중 왕건까지 의심을 하자, 결국은 왕건을 따르는 장군들이 궁예를 몰아내게 되었습니다.

     

    918년 궁예가 쫓겨나고 태봉이 몰락하였으며, 왕건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국호는 고려, 연호는 천수라 하였습니다.

    왕건은 처음에는 인질을 교환하면서 고려와 후백제와의 싸움을 중단하였으나 얼마 후 후백제에 인질로 잡혀간 진호가 갑자기 죽자 상황이 돌변하였습니다. 이미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한 신라에서는 지방 호적들이 고려와 후백제에 독립적으로 소통하고 있었습니다. 삼한을 두고 고려와 후백제가 경쟁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고려가 주도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후 두 나라의 세력은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나, 후백제는 내부 균열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후삼국의 통일 과정과 통일왕조 왕건

    후삼국의 통일은  936년 왕건이 명주대광의 왕순식과 백제 경훤왕과 함께 말갈기병과 호족들을  동원하여 총 10만여 명의 군대를 이끌고 일리천에서 후백제군을 황산에서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습니다.

    후백제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내부 사정이 혼란스러워졌고 견훤이 아들 신검의 부하에 의해 폐위되어 금산사에 갇히면서 백제 정치판이 혼란스러워졌습니다. 화가 난 경훤은 왕건에게 항복하고 고려의 월경지 나주를 통해 고려로 귀순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신라 경순왕은 935년에 고려에 나라를 바치게 되고, 왕건은 백제국의 시조인 경훤을 상보로 받아들여 경순왕으로부터 신라의 전통과 권위를 계승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후삼국의 혼란을 잠재우고 새로운 통일왕조를 수립하는데 성공한 왕건은 발해인들을 받아들이며 북진정책을 실행하여 영토확대와 거란족 경계와 서경 개척에 힘썼습니다. 유금필 장군에게 동북 지방을 개간시켜 영토를 확장해 나갔습니다.
    또한 신라의 전통적인 권위를 이용하여 활용하고자 하였으며 경순왕이 신라의 지배층을 흡수·회유하기 위해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였고, 통일 후에는 혼인 정책을 통해 호족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면서 이들과 연합하였습니다.

    후삼국의 통일 과정과 통일왕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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