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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고려 왕들의 업적과 고려 초기의 상황한국사 2024. 4. 9. 06:00
중세 고려는 태조 왕건이 918년에 설립한 나라입니다. 후백제와 신라를 통합하고, 이성계가 조선 왕조를 건국하기 전까지 475년간 통치를 했습니다. 고려는 '꼬레아'라고 불렀던 서양 지역 상인들에 의해서 지금의 우리나라 영어 이름인 '코리아'로 불러지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고려는 개방적이고 국제화된 국가였으며, 그것은 조선보다 여성들의 지위가 훨씬 더 높았음을 의미하며, 문화적으로도 다원적이고 역동적인 사회였습니다.
그럼 중세 고려 왕들의 업적과 고려 초기의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려의 고구려 계승
고려는 동명성왕이 세운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고려'라고 국호를 칭하였습니다. 고구려의 장수왕 이후로도 고구려를 고려라고 불렀으며, 궁예가 설립한 국가 이름도 처음엔 고려였으나 이후 마진, 태봉으로 변경되었습니다.
고려 왕들의 업적
고려는 송악 지역의 호족 왕건에 의해 918년에 세워졌고, 송악을 개경(개성)으로 개명하고 수도로 만들었습니다. 936년에는 한반도를 태조 왕건이 재통일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민생을 중시하여 민생안정책으로 세금제도를 보다 합리적으로 개선하여 세육을 1/10로 낮추었습니다. 빈민구제기구인 흑창과 개경, 서경에 학교를 설치하고 학보라는 장학기금을 운영하였습니다. 사찰을 건립하고 승록사를 설치하여 승적을 관리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호족과의 융합을 도모하기 위하여 호족과 혼인관계를 맺어 혈연관계를 맺었고, 호족들에게 자신과 같은 성인 '왕'씨를 하사하거나 성을 주어 우대하였으며 호족의 자제를 서울에 올라와 숙위하도록 하는 기인제도도 만들었습니다. 기존 지배집단을 이용하여 지방의 호적 세력을 무마하고 통제하기 위해 사심관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태조 왕건은 북진정책으로 고구려의 계승 의지를 분명히 하여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였고,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을 서경이라 하여 중요시 여겼으며 청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하였습니다. 후대 왕들에게 남기는 교훈이 담긴 서적인 <훈요 10조>를 남겼습니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를 시행하여 왕권을 안정시키고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였으며, 공신과 호족 세력을 제거하여 왕권을 강화시켰습니다. 4색 공복제를 제정하여 관료체제 질서도 확립하였습니다.
성종은 2성 6부 체제의 중앙정치제도를 정비하고, 지방에 12목을 설치하고 향직을 개편하여 지방 호족 세력을 통제하였습니다. 군사기구를 설치하였는데 중앙군에 2군 6위, 지방군에 당의 부병제를 모방한 병농일치의 의무병제로서 양인인 백정들로 조직되게 하였습니다. 의창제도를 마련하고 물가조절 기관인 상평창을 설치하여 빈민구제를 위한 민본주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고려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동요
고려 문벌 귀족 사회는 이전의 신라와 달리 한 가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러 가문에서 높은 지위를 가진 고위 관리를 배출하는 것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 가문에서 자신의 대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대에 걸쳐 높은 지위를 가진 이를 배출하였습니다.
문벌 귀족 사회 성립의 세력기반은 크게 정치적 기반과 경제적 기반으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습니다.
- 정치적 기반으로는 일반적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들은 과거제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나 5품 이상 고위 관직들의 자제들은 음서제를 통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음서제는 관직 진출의 제한이 없었기 때문에 해당 집안에서 고위 관료를 계속 배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경제적 기반으로는 일반적으로 관직에 진출한 이들은 전시과 제도에 따라 토지를 지급받았습니다. 이는 토지 자체의 소유권이 아니라 해당 토지에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만 부여하는 수조권이었습니다. 수조권은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를 주었고, 관직에서 물러나면 반납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5품 이상 고위 관직들의 자제들은 전시과 이외에 공음전을 추가로 받았으며, 공음전을 받은 이가 관직에서 물러나더라도 국가에 반납하지 않고 토지의 세습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문벌 귀족들의 과거와 음서제도를 통하여 문벌귀족의 관직이 독점되면서 개경의 문벌귀족과 지방출신의 신진관료들 사이에 대립이 심각해지면서 문벌 귀족 사회가 동요되었습니다. 관직에 따른 전시과와 5품 이상의 고위 관리에게 지급되는 공음전을 통해 토지를 확대하였으며, 특별한 공로를 인정받은 경우 국왕에게 받은 사전과 권력을 이용한 불법 토지 겸병으로 귀족들이 소유하는 토지가 급증하면서 문벌귀족의 막대한 사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왕족과의 혼인을 통한 가문의 세력유지를 위해 경쟁이 치열하게 되면서 문벌귀족들은 점차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자겸은 경원 이씨의 문벌귀족으로 당시 80여 년간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왕이었던 예종과 인종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어 막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왕이 한안인을 비롯한 측근 세력을 통해 이자겸을 쫓아내려고 시도하였으나, 이를 먼저 알고 이자겸이 자신의 측근인 척준경과 더불어 개경의 황궁을 불태우는 등 반격을 가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자겸의 난으로 인해 이자겸은 영광으로 귀양하게 되고 척준경도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이자겸의 난 이후에 묘청을 중심으로 한 천도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은 풍수지리설을 기반으로 개경의 지덕이 쇠하였으니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묘청이 주장하였습니다. 서경에 대화궁을 짓고, 이자겸 때 나타났던 금에 대한 사대를 중지하고 금을 정벌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묘청의 주장은 당시 이자겸의 난으로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려던 인종의 의도와도 일치하여 수용되었습니다.
이에 김부식 등의 문벌귀족은 서경파의 천도론을 미신행위로 공박하며 반대하였고, 이에 인종 역시 갑작스럽운 서경천도에 부담을 느껴 반대하였습니다. 묘청은 국호를 대위, 연호를 천개라 하여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1년 만에 진압당하면서 서경세력의 정권 장악의 꿈은 물거품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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