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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의 무신정변이 일어난 배경과 발생과정 그리고 형성기와 확립기
    한국사 2024. 4. 9. 07:04

     

    고려의 무신정변

     

     

    고려에서 일어났던 무신정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신정변의 배경

     

    무신정변의 배경은 이자겸의 난, 묘청의 서경천도운동으로 귀족사회 내부의 모순이 심화되면서 무신에 대한 차별 또한 심화되면서 발생하였습니다. 같은 귀족 신분이지만 무신은 문신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고 있었는데, 군역에 종사한 대가로 지급하였던 군인전마저도 문신들의 겸병의 대상이었고, 군역 외에도 각종 잡역에 동원되어 군인과 무신들은 불만이 많았습니다.

    더군다나 유흥에 빠진 의종은 무신보다 문신을 더 높이 취급하였고, 궁궐 안의 내시마저 궁궐을 장악하면서 무신들에 대한  멸시와 천대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으며 권력에서 멀어지는 현상도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의종은 유흥을 위해 개경 주변 사찰을 순회할 때마다 무신들에게 호위를 명하였으며, 이에 불만을 품은 무관들이 정중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문신 김돈중의 행패가 심하였는데, 고려 1144년 나례 때 정중부의 수염을 김돈중이 태우는 모욕적인 사건이 발생하였고, 이에 정중부가 항의하자 김돈중의 부친인 김부식이 그의 권력을 행사하여 정중부를 처벌하려 하였습니다. 그 후 1167년 김돈중이 본인의 실수로 고려 의종에게 화살이 떨어지면서 암살미수로 오해를 받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김돈중은 오히려 호위군인 순검군과 건룡군의 무신들에게 누명을 덮어씌워 많은 무신들이 처벌을 받게 되자 무신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만 갔습니다.

     

    무신정변의 발생 과정

     

    무신정변의 발생은 의종이 문신들과 보현원에 놀러 갔을 때 일어났습니다.

    의종 24년, 향락에 빠진 의종은 궁궐 밖을 문신들과 놀러 다니기에 바빴습니다. 이런 와중에 무신들은 멸시와 격무에 큰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음력 7월 1일 일식이 일어나자 백성들은 불길한 징조라 하여 민심까지 흉흉해졌고, 8월 1일에는 연복정이 범람하여 군사들이 동원되어 수리하느라 고된 노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종이 문신들과 함께 연복정과 흥왕사 일대를 돌며 놀고 있자 무신들의 분노는 극에 치닫게 되면서 이를 틈타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무신정변이 발생하는 과정이 전개되었습니다.

    무신들은 의종을 폐한 후, 왕의 동생인 명종을 왕위에 옹립하였습니다. 이후 무신들은 요직을 차지하여 문신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정권을 이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170년에 시작하여 마지막 무신집권자 임유무를 마지막으로 무신정권은 100여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무신정변의 형성기와 확립기

    1. 무신정변의 형성기에는 관직, 토지, 노비를 무신정권자들이 독점하고 장악하여 무단정치를 실시하였으며, 권력기구인 중방을 세워 지배기구의 역할을 함으로써 문신 중심의 정치는 그 기능을 상실하였습니다. 이에 무신집권에 대한 반발로 김보당, 조위총 등이 거병하였으나 실패로 끝났으며, 귀법사 승려 200여 명도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집권한 무신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발생하였던 시기로 정권이 교체되기도 하였습니다.

     

    2. 무신정변의 확립기는 최충헌을 시작으로 4대에 걸쳐 62년간 최씨 무신정권이 성립하던 시기입니다.

    최충헌은 <시무 10조>를 발표하여 조세제도 개편, 토지겸병 금지, 승려의 고리대금 금지를 명하였고, 농장과 노비의 소유를 확대하고, 사병 양성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전제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도방 강화 및 왕의 폐립을 자행하고 교정도감을 설치하였습니다.

    독재정권 유지에 방해가 되는 무신 세력을 제거하고 자신들의 부족한 정치적 식견을 보완해 주는 문신들을 등요하였으며, 문신들의 보호를 받던 교종 승려들의 반발이 심화되자 교종 대신 선종 승려들과의 연결을 도모하였습니다.

    최의를 마지막으로 최씨 무신정권은 종결되자 그 뒤를 이어 김준, 임연 등이 정권을 장악하였지만 무신정권은 점차 약화되었습니다. 고려의 왕실은 몽골과 결합하면서 무신집권을 무너뜨리기 시작하였고, 몽골의 비호를 받은 원종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무신집권은 종식되었습니다.

     

     

    무신정변기의 농민과 천민의 반란

    무신정변기의 농민과 천민의 반란은 지나친 농장 확대와 부역 동원 및 무신집권자들의 가혹한 수탈행위가 배경이 되었습니다. 의종을 폐위시킨 후 정중부, 이의방, 이고는 의종이 개인적으로 축적한 재산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정중부는 원래 성격이 탐욕스럽고 재산에 욕심이 많아 시중이 된 이후 농장을 널리 확대시켜 나갔고, 거의 집안 노예와 문객들은 그의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행사해 모든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였습니다. 최충헌은 자기 집을 지을 때 민가 100여 채를 허물고 크고 화려하게 대궐과 비슷하게 만들려 하였으며 십자각을 지을 때도 부역 동원이 심해 백성들의 불평이 많았습니다. 

    이의민은 천민출신이었으나 무신정변 때 공을 세워 장군으로 바로 승진하였습니다. 이런 천민 출신 무신집권자의 등장에 따른 신분 상승에 대한 기대감도 고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향,소,부곡 주민들의 삶은 여전히 어려웠고, 이에 농민과 천민의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농민반란은 무신집권자의 지나친 수탈로 이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는데 대표적으로 조위총의 난, 망이·망소의 난, 감사미·효심의 난이 있습니다. 조위총의 난은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농민들이 대규모로 합세하여 일어난 반란이고, 망이·망소의 난은 공주 명학소에서 무거운 조세 부담에 대한 반발로, 감사미·효심의 난은 운문과 초전에서 각각 일어나 봉기에서 연합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천민반란은 천민 무신집권자의 등장에 따른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감으로 일어났으며 대표적인 사건은 전주 관노의 난과 만적의 난이 있습니다. 전주 관노의 난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 반발하여, 만적의 난은 최충헌의 사노비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해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외 신라 부흥 운동(경주), 고구려 부흥 운동(서경), 백제 부흥 운동(담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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