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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중세 남북구 시대의 후기 신라와 발해
    한국사 2024. 4. 9. 01:22

    한국 중세 남북구 시대는 고구려의 유민 출신인 대조영에 의해 건국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신라가 대동강 남쪽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남북구의 형세를 형성한 시기를 말합니다. 

    남북구 시대에 해당하는 후기 신라와 발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중세 남북구 시대의 후기 신라와 발해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과 발해의 존재

     

    신라의 삼국통일 과정은 백제가 의자왕이 즉위 후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백제가 신라의 대야성을 비록 40여 개의 성을 빼앗고 고구려와 함께 대야성을 공격하자 이에 위기에 처한 신라는 고구려에게 구원 요청을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당과 연합하여 나·당연합군을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이어 백제를 황산벌에서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를 물리치고 사비성을 함락시켜 백제를 정복하였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수·당의 지속적인 전쟁으로 국력이 많이 소모되었고, 지도층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인해 분열된 상태였습니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킴으로써 고구려가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는 부흥 운동을 일으키지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676년부터 935년까지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시키고, 나당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한반도를 통합한 후 신라는 '통일신라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발해의 존재가 인식되면서 일부 역사학자들은 '통일신라'라는 명칭에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발해가 세워진 698년부터를 남북구 시대라고 하여 발해를 역사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가 분분하였습니다.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인식하게 된다면 신라의 삼국통일은 완전한 삼국통일로 보기 힘들다는 의견이 생기면서, 그 명칭을 '대신라' 또는 '후기신라'로 대체하기도 하였습니다.

     

     

    삼국통일 이후의 후기 신라의 최전성기

    삼국통일 이후 후기신라는 영역 확대와 함께 인구의 증가가 늘어남으로 인해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였습니다. 대외 관계가 안정적으로 이르자 비약적 발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한 강력한 군사력도 확보되어 정치 안정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열왕은 최초의 진골 출신 왕으로서 이후 신라 중대에는 무열왕 직계자손이 왕위를 독점하는 등 왕권을 강화하면서 신라의 최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왕은 귀족 세력을 숙청하고 정치 세력을 재편성하였습니다. 화백회의의 기능을 약화시켰으며, 통일 전의 5부 체제를 중국의 6전 제도와 비슷하게 개편하였습니다. 중앙정치기구를 완비하면서 14부를 편성하고, 17 관등제를 마련하였습니다. 지방은 9주 5 소경 체제를 정비하고, 외사정이라는 감독관을 파견하여 감찰을 강화하였습니다. 군사는 9 서당(중앙군), 10정(지방 군)으로 정비하였으며, 관료전을 지급하고 녹읍을 폐지함으로 귀족의 토지에 대한 인신적 지배를 억제하였습니다.

     

     

    후기 신라에 등장한 지방세력 호족의 성장과 정치의 변동

    후기 신라에 등장한 지방세력 호족은 중앙정치의 혼란을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면서 등장하였습니다.

    8세기 후반의 통일신라는 진성여왕 때 이후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지방에서는 반란이 심화되었습니다. 귀족들은 녹읍을 토대로 하여 대토지 소유를 확대하기 시작하였으며, 농민은 토지를 상실하여 궁핍한 생활로 인해 노비나 초적으로 전락하면서 이에 따른 반란도 발생하였습니다. 또한 농민들에게 이중, 삼중으로 조세를 수취하여 농민의 조세 부담이 증가되었습니다. 그래서 원종과 애노의 난, 적고적의 난과 같은 농민봉기가 많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를 성주, 장군이라고 칭하면서 나타난 지방세력 호족의 출신 성분은 신라의 왕위다툼에서 밀려난 세력, 신라의 군진이나 군사적 요지를 바탕으로 성장한 세력, 해상에서 세력을 키워 등장한 세력, 신라의 말단행정구역인 촌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촌주세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지방을 직접 다스리면서 관리를 두고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선종 승려나 6두품 지식인과 풍수지리사상을 맞이해 통치력을 키워나갔습니다. 

     

    발해

     

    발해는 고구려의 멸망 이후 요동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운동이 전개되자 이에 당이 보장왕을 요동의 도둑으로 임명하는 등 분열 정책을 실시하였습니다. 거란족인 이진충의 반란을 틈타 고구려의 유민이었던 대조영이 길림성 돈화현 동모산으로 가서 당에 반기를 들었으며, 이곳에서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발해를 건국하였습니다.
    발해 사람들이 고구려 계승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여러 곳에서 입증이 되었습니다. 발해 무왕 때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고려 왕을 칭하였으며, 발해 스스로 자신들을 고려국이라 하였습니다.
    2대 무왕은 연호를 인안으로 사용하였으며,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당과 신라를 견제하는 등 강력한 외교 정책으로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3대 문왕은 연호를 대흥으로 정하고, 영토 확장보다는 내정과 외교에 방점을 찍었습니다. 당의 3성 6부제를 받아들여 중앙 및 지방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유교경전을 강화하였으며, 중앙교육기관인 주자감을 설치하였습니다. 무왕 때 멀어진 당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친교를 맺었으며, 신라와는 상설 교통로를 개설하였습니다.
    이후 몇 명의 왕이 단기간에 사망하고 제10대 선왕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발해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룩하였습니다. 중국 대륙과 신라를 공격하여 발해의 최대 판도를  이룩하여 해동성국이라 칭하였습니다. 5경 15부 62주의 지방제도가 완비되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제15대 왕인 대인선 때 귀족 간의 다툼으로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거란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멸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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