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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구와 사림의 대립
    한국사 2024. 3. 27. 06:00

    조선왕조 개창 초기의 어수선함과 각종 제도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성종 때 <경국대전>이 반포되면서 점차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이에 정치 세력이 크게 훈구와 사림으로 나뉘어 대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훈구와 사림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훈구

    훈구는 고려 말에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급진파 사대부 출신들이었습니다. 계유정난부터 세조가 집권할 수 있게 만든 공신들로 이들은 실권을 장악하고 중앙집권체제를 강조하여 국왕 중심의 전제 왕권을 위한 법치주의를 중시하였습니다. 

    훈구 세력은 왕실과 혼인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였으며 중앙에서 현실정치에 참여함으로써 세력을 키웠습니다. 의정부와 6조에서 활동하였고, 학문적으로 국가 운영에 필요한 공문서와 외교문서를 작성하는데 주로 필요한 사장을 중시했습니다. 관학파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제도 정비에도 기여하였습니다.

    훈구는 막대한 토지 소유를 바탕으로 대지주로 성장하였습니다. 15세기 이래 늘어난 농업 생산량과 상공업을 독점하려는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서해 간척사업과 토지 매입을 통해 농장을 확대하였으며 대외무역 및 방납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사림

    사림은 15세기 후반부터 서서히 중앙정치에 참여한 세력이었습니다. 성종 때 김종직의 등용을 시작으로 훈구의 비대 방지와 정권 독점을 견제하기 위하여 등용되었습니다. 길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과 대립하여 정계에 진출하였습니다. 중소 지주적 배경을 바탕으로 영남과 기호 지방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향촌 자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유교적 이상정치인 도학정치를 중시하면서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왕도정치를 강조하였습니다.

    사림은 지방에서 제자와 인재 양성 그리고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며 주로 3사 등 언론기관에서 활동하였습니다. 성리학적 향촌 질서 확립을 열망하였습니다.

    농업의 발달로 농업생산성이 향상되자 농촌의 중소 지주층인 사림도 경제적 지위가 올라가고 농민들과 어울려 점차 농촌 사회도 안정화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훈구가 향촌 사회를 장악하려고 권력을 사용하여 농장을 확대하면서 사림의 이익과 정치적 기반을 침해하자 사림은 이에 반발하면서 현실과 훈구의 독점을 비판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

     

     

    사화의 발생과 그 결과

    무오사화

    무오사화는 1498년 연산군 때 일어난 첫 번째 사화이었습니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극돈 등의 훈구 세력이 김일손이 제출한 사초를 문제 삼아 일으킨 사건이었습니다. 사초에 수록된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저술한 조의제문에 문제가 있다고 봤습니다.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사해된 의제를 애도하는 글로, 조카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에 대한 비난의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또한 훈구파에 대한 비리와 부정적인 내용들도 함께 적혀있었기에 이에 격분한 연산군 측의 훈구 세력이 사림 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었습니다. 

    무오사화로 인하여 사초 사건에 관련된 김일손 등 신진 관료들이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 및 파직되면서 사림 일부만 생존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성종대 이후 중앙에 진출해 점차 정치적 입지를 확장시켰던 사림은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갑자사화

    갑자사화는 1504년 연산군의 생모 윤 씨의 폐비사사 사건을 둘러싸고 대립하면서 발생한 사화였습니다. 훈구 세력 중 연산군 측의 척신과 일반 훈신 간의 반목이 심화되었는데, 연산군 측의 척신이 반대파를 제거하였습니다. 갑자사화는 훈구 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나 이를 계기로 남아 있던 사림도 화를 당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연산군은 왕위에서 축출되었습니다. 

     

    기묘사화

    기묘사화는 1519년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의 정치 개혁 시도로 인해 이를 역모로 몰아 사림 세력을 축출한 사건이었습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사림 세력은 성장하는 반면 공신 세력의 정치적 입지는 점차 약화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조광조는 자신의 세력을 정계에 끌어들이기 위해 현량과를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고, 사림의 향촌 자치 질서의 수립을 위하여 향약을 실시하고자 했습니다. 또한 조광조는 훈구파에 대한 견제를 목적으로 위훈삭제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조광조 등의 사림이 제출한 위훈삭제 사건으로 공신 세력은 사림을 타개하기 위한 일대 반격을 준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 이후 공신을 책봉하는 과정에서 거짓이 있었으니 이를 삭제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공신 세력들이 남곤 등의 주도하에 사림에 대한 반격을 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림들이 정계에서 물러나거나 축출되었습니다.

     

    을사사화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년에 발생한 사화로 중종의 이복왕자를 둘러싸고 외척 간에 대립하는 과정에서 일부 사림이 화를 당한 사건이었습니다. 윤임을 중심으로 한 인종의 지지 세력인 대윤과 윤원형을 중심으로 한 명종의 지지 세력인 소윤이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외척 간의 대립은 중종을 이어 인종이 즉위하면서 대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리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1년 만에 죽고 명종이 즉위하게 되자 소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외척 간의 싸움에 연루된 사림의 일부가 화를 입었다고 해서 이를 사화로 불렀습니다.

     

     

     

    사림의 정치적 성장의 기반이 되는 향촌과 서원

    4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들은 정권을 잃지 않고 유지하여 결국 훈구를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치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사림은 지방의 항약과 서원을 기반으로 지지 기반을 확산하였습니다.

     

    • 향약은 향촌의 교화를 위해 만든 향촌 자치 규약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중국의 <여씨향약>이 번역되면서 전국에 보급되었으나, 점차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군현이나 마을 단위로 실행하게 되면서 사림들이 지방에서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갔습니다. 예전에 운영되었던 계의 방식이 향약 속에 흡수되면서 농민들의 생활은 점차 안정되었습니다.

     

    • 서원은 선현의 봉사와 후진 양성을 위해 세워진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학문 연구 및 양반가의 자제들을 교육하였습니다. 주세웅이 세운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은 안향을 이곳에 배향하였습니다. 이후 이황의 건의에 따라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왕에게 수여받았습니다. 서원은 국가에 토지, 서적, 노비를 지급받고 세금을 면제받았습니다. 하지만 서원은 초기에는 학문과 교육 발전의 계기가 되었지만, 점차 정계에서 물러난 인사들이 재기를 다지는 정치적 후방 기지의 기능을 하면서 자기 당파의 결속을 강화하여 붕당을 만드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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