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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은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하여 전파한 학파입니다.
성리학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리학의 수용과 흐름
성리학의 수용은 고려 말 안향에 의해 보급되었습니다. 이제현 등은 충선왕이 북경에 세운 만권당에서 원의 저명한 학자들과 교류하였고, 원에서 과거제를 실시하자 고려의 이곡, 이인복, 이색 등이 응시하여 급제하기도 하였습니다. 고려에서도 성리학 서적인 사서를 과거의 시험과목으로 포함시키면서 성리학이 확산되었습니다.
성리학의 정치철학으로서의 특징
- 지식인들의 정치 참여를 강조하였습니다.
- 피지배층 개개인의 도덕적 교화뿐 아니라 지배층의 도덕적 자기 수양이 정치적 근본임을 강조하였습니다.
- 농업을 근간으로 하는 자급자족 산업구조와 이를 실현하는 가족 및 지역 공동체와 같은 소규모 단위들을 긴밀하게 연계시키려고 하였습니다.
- 불교 등의 기타 신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일원화된 가치 기준으로 사회를 재편성하려고 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신흥유신
성리학을 받아들이고 과거에 급제한 문신 관료들을 신흥유신이라고 하였습니다. 신흥유신은 사회 경제적으로는 권문세족 출신도 있었으며 대부분 과거에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통해 유대감이 서로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리학자로서 현실 문제를 개혁하는데 적극 참여하였습니다.
신흥유신은 성리학을 바탕으로 조선의 건국이념에 기초를 세웠습니다. 신흥유신은 불교와 도교 등을 이단이라 하여 배척하였는데, 정도전의 <불씨잡변>과 <심문천답>이 대표적인 저술서입니다. 또한 <조선경국전>에서는 이러한 이념에 바탕을 둔 국가체제에 대한 정치적 구상과 운영방식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권근의 <입학도설>에서는 성리학의 기본 개념을 그림과 함께 소개하였습니다.
성리학의 보급
성리학의 보급은 조선을 건국을 주도한 신진사대부들에 의해서 성리학 이념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는 풍속의 교화가 왕도정치 이념과 직결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각 지방 단위마다 향교를 설치하고 교관과 책을 보급하는데 노력하였으며, 서울에서는 사학을 설치하고 성균관을 강화하여 성리학을 보급하였습니다. 사서와 오경을 과거 시험과목으로 넣어 교육기관에서 이를 가르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경연을 강화하여 제왕의 수양과 통치를 배우기 위한 학습서로 <대학연의>를 중시하였습니다.
문자 해독 능력이 부족한 계층을 위해 대민 교화서를 제작하고 반포하였습니다. 교화서의 대부분은 유교의 기본 윤리강령인 삼강오륜에 관한 것으로 <삼강행실도>가 대표적인 서적이었습니다. 이는 일종의 사례집으로 충, 효, 열, 삼강을 잘 실천한 사례를 뽑아서 간추린 서적이었습니다. 앞면에는 그림을 그려 넣고 뒷면에는 글을 실어서 문자 해독 능력이 부족한 이들에게 그림을 보여주면서 설명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성리학과 국가의례
성리학 이념에 맞춰 국가의례를 정비하는 것을 중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려의례 중 불교적 성격의 민강신앙적인 요소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각종 불교 도량뿐 아니라 도교 제례를 행하던 장소들도 폐쇄하였습니다.
그러나 성리학 이념을 강조하고 체계화하면서도 일부는 현실에 맞춰 변경시켰습니다. 원구단은 폐지하였으나 원구단에서 행해졌던 기우제인 우사는 계속 진행하였습니다. 농경사회에서 하늘에 대한 기우에 대한 예의를 외면하기는 사실상 힘들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의 국가의례는 태종 후반에 틀을 완성하여 세종에서 수정하고 보완하여 <세종실록오례>를 편찬하였습니다. 오례는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를 의미하였습니다. 성종에서는 <세종실록오례>를 다시 수정하고 보완하여 <국조오례의>를 편찬하였고, 이는 조선후기까지 국가의례의 기본 지침서로 중시하였습니다.
성리학의 입장에 대한 논쟁
성리학은 이황학파의 영남 남인과, 이이의 학문을 조선 성리학의 정통으로 만들려는 이이학파의 노론 사이에서 성리학의 이기론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습니다. 이황학파는 주리파로 인간의 이성을 강조하여 인간의 도덕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에 이이학파는 주기파로 인간의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면을 중시하고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면을 더 강조하였습니다.
이황은 이가 원인이고 기를 결과로 설명하며 이가 발하면 기가 따라서 발하는 이기호발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후에 유성룡과 김성일에 이어져 주리론 이론을 완성하였습니다.
이이는 이와 기는 서로 상호의존적이고 보완관계에 있는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였으며 김장생과 조헌이 이어받아 조기론을 완성하였습니다.
성리학의 교조화로 인한 영향
성리학의 지나친 교조화로 주자 중심의 성리학을 상대화하고 6 경과 제자백가 등에서 모순 해결의 사상적 기반을 찾으려는 경향이 나타났습니다.
윤휴는 주자의 학설과 사상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독자적 학문 체제를 구축하였습니다. 숙종 즉위 때부터 경신대출척 전까지 많은 개혁안들을 제시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사문난적으로 규탄받아 처형되었습니다.
박세당은 성리학이 스승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것이라 파악하고 자유로운 비판을 강조하였습니다. 일상적 일용 행사를 통한 인식의 타당성을 강조하면서 주자와 달리 인식의 상대성을 주장하였습니다.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인정하고 능동적 실천행위와 주체적 사고행위를 강조하였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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