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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항일독립운동한국사 2024. 3. 14. 18:25
1920년대 일어난 항일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무장독립투쟁과 학생운동으로 나누어 알아보겠습니다.
항일독립운동 중 무장독립투쟁
항일독립운동은 민족주의 사명 아래 국내 진공을 목적으로 3.1 운동 이후 이주 조선 동포사회를 기반으로 성장한 서북간도와 노령의 수많은 항일독립단체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격렬한 무장독립투쟁을 벌였습니다. 동북만주에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대한정의군정사, 광복단, 의군부가 있었습니다. 남만주에는 서로군정서군, 한말 의병장 중심의 대한독립단,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건설운동의 성과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일본은 대규모의 군대를 이끌고 국경 지역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는 항일독립단체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표적인 무장독립투쟁으로는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가 있습니다.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주도 하에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의 연합부대가 연합하여 싸운 무장독립투쟁의 항일독립운동이었습니다. 무장독립군의 활동으로 국경 일대의 식민통치가 마비되고 일본 정규군이 무장 독립군에 연패를 당하자 일본은 무장독립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추격해 오던 일본군을 무장독립군이 삼둔자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물리쳤습니다. 이 삼둔자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은 무장독립군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한 작전을 전개하고 '월강추격대대'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무장독립군단을 토벌하기 위해 무장독립군의 본거지인 봉오동을 공격하였습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여 최진동의 군무도독부군, 안무의 군민회군, 신민단군과 연합부대를 결성하여 봉오동 골짜기 인근에 포위진을 치고 일본군을 유인해 일본군을 물리친 항일 무장독립투쟁이었습니다.
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의 주도하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신민단군이 주축이 되어 만주 독립군 연합부대가 벌인 항일 무장독립전투였습니다. 무장독립군은 일본군의 만주 출병을 피해 장백산으로 이동하였으나, 일본군은 '혼춘사건'을 날조하여 대규모의 군을 만주에 투입하였습니다. 일본군 대병력의 공격을 피해 간도지방의 무장 독립군은 백두산으로 이동하였고 북로군정서군, 국민회군, 대한신민당 등은 본거지를 떠나 화룡현 삼도구에 집결하였습니다.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을 비롯한 여러 무장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대부대를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대승을 거둔 항일 무장독립투쟁이었습니다.
일본군은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서의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참변을 자행하여 항일독립운동 기지와 한인촌을 파괴하였습니다.
무장독립군의 이동과 시련
무장독립군은 일본군의 추격이 없는 안전지대에서 무장독립군 부대의 재정비를 위해 이동하였습니다. 만주 국경 지대의 밀산부에 4,000여 명이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대한독립군단을 편성하였습니다. 대한독립군단은 자유시로 이동하여 적색군과 손잡고 내전에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적색군은 무장독립군에 대한 무장해제를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자 무장독립군을 강제로 무장 해제 시켰습니다.
항일 무장독립군의 재정비와 통합운동
항일 무장독립군은 3부로 재정비를 하였습니다. 육군 주만 참의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직할부대로 압록강 연안 지역에 위치하였고, 정의부는 길림과 봉천을 중심으로 남만주 일대에서 결성되었으며, 신민부는 북만주 지역에서 탈출한 무장독립군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습니다.
3부의 활동은 군정부체제를 마련하였으며 각기 관할지역 동포들의 자치행정을 맡아보는 민주적 민정기관을 설치하고 입헌정치 조직을 구축하였습니다. 무장독립군은 훈련과 작전을 맡아보는 군정기관을 설치하고 자체 독립군 편성으로 한.만 국경지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3부의 통합운동을 전개하는데 있어 정의부의 주도 아래 여러 차례 통합회의를 개최하였습니다. 그러나 의견 차이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의 완전통합에 실패하였습니다. 남만주 지역에서는 정의부의 주력파와 참의부, 신민부의 일부 인사가 국민부를 결성하였습니다. 국민부는 남만주 지역의 한인 자치기관의 업무를 수행하고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습니다. 조선혁명당은 조선혁명군으로 편성하여 국민부 지역의 무장독립군, 항일 무장투쟁을 주도하였습니다. 북만주 지역에서는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 참의부의 일부 인사가 혁신의회를 조직하였고, 혁신의회는 한국독립당으로 개편하고 무장 조직으로 한국독립군을 결성하였습니다.
항일독립운동 중 학생운동
6.10 만세운동(1926)
6.10 만세운동은 민족주의 대 사회주의 진영 간의 노선 대립으로 인한 진로 모색의 어려움과 순종의 승하를 계기로 일어났습니다. 3.1 운동 이후 학생이 독립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고, 일제의 수탈정책과 식민지 교육에 대한 저항의 의지가 기반이 되었습니다. 순종의 인산일에 사회주의 세력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습니다.
6.10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학생들이 독립운동의 주체로 부상하고 비밀결사 형태의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민족유일당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광주 학생항일운동(1929)
광주 학생항일운동은 일본 남학생의 한국 여학생 희롱 사건으로 양국 학생의 대결과 충돌이 발단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식민지 차별 교육에 대한 불만을 품은 학생들이 항일결사 조직을 만들었고, 학내 문제의 해결과 일본인 교원의 배척을 요구하면서 동맹 휴학이 빈발하였습니다. 학생층이 민족독립 투쟁의 중심이라는 인식이 확대되었으며 민족유일당 운동으로 신간회가 결성되었습니다. 신간회가 개입하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만주 및 일본의 유학생들도 동조하였습니다.
광주 학생항일운동은 학생운동이 소극적 동맹 휴학에서 가두시위 형태로 발전하였고, 신간회가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면서 민족 투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식민지 교육은 물론 식민 통치에 대한 반발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3.1 운동 이후에 일어난 최대의 민족운동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습니다. 이로써 학생층이 독립 투쟁의 주역으로 부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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