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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대의 독립운동과 3·1 운동
    한국사 2024. 3. 11. 22:05

    1910년대 일제강점기에 나타난 독립운동과 3·1 운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는 독립의군부, 대한광복군(광복회),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 조선국민회, 조선산직장려회, 자립단, 송죽회 등이 있습니다.

     

    • 독립의군부는 1912년 임병찬이 고종의 밀서를 받아 조직하기 시작해 1913년 의병잔존 세력과 유생들을 호남지방에서 규합하여 조직하였고, 1914년에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습니다. 일본의 총리대신과 조선총독 등에게 국권반환요구서를 제출하는 등 일본 통치에 항거하며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러나 1914년 5월 일본 경찰에 적발되어 국권회복운동이 실패하고 임병찬은 거문도에서 순국하였습니다.
    • 대한광복군(광복회)은 1913년 채기중 등이 경북 풍기에서 조직하였고 1915년 대한광복회로 개칭하였습니다. 총사령 박상진, 부사령 이석대, 지휘장에 권영만을 두어 군대식 조직과 각 동에 지부장을 두어 만주지부도 결성하였습니다. 군자금 모금과 친일파 암살 등의 활동을 하다가 1918년 이종국의 밀고로 활동이 중지되었습니다. 
    •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는 1915년 윤상태, 송상일, 이시영 등 경북지방 유생들이 유생토론회를 가장하여 조직하였습니다. 단군을 받들고 국권회복운동과 국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3·1 운동 때 적극 참여하여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금하였습니다.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나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해체되었습니다.
    • 조선국민회는 1915년에서 1918년까지 장일환 등 숭실학교 학생과 기독교 청년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여 활동하였습니다. 애국계몽과 민족의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주권회복 투쟁을 계획하고 간도, 중국과 연결하여 무기를 수입하였습니다.
    • 조선산직장려회는 1914년 서울에서 교사들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경제 자립을 통한 국권회복을 도모하여 1917년까지 활동하였습니다.
    • 자립단은 1915년 함남 단천에서 조직되어 단원의 입회비와 회비를 모아 실업을 경영하고 청년교육을 하며 1916년까지 활동하였습니다.
    • 송죽회는 1913년에 숭의여학교 여교사들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해외 독립운동기금 마련과 여성 계몽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일제 말까지 계속 활동하고 해외로까지 조직이 확대되었습니다.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단체

    1910년대 국외 독립운동 단체는 서간도, 북간도, 남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 등에서 활동하였습니다.

    • 서간도에서는 독립전쟁론을 주장하던 신민회의 독립군 기지 건설 계획에 따라 경학사, 신흥강습소를 설립하여, 이주 동포들은 경제적으로 이익을 보았으며 반일 민족의식이 고취되고 군사교육을 실시하였습니다.
    • 북간도에서는 간민회가 교육과 선전으로 인재를 양성하고, 중광단은 옛 의병들이 규합하여 무장활동을 벌였으며, 대종교 세력이 만든 학교와 포교당, 명동학교 등에서 교육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였습니다.
    • 연해주에서는 의병항쟁이 활발히 진행되었습니다. 권업회는 러시아 내 한인 사회의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고 계몽교육과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상설,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독립군을 조직하여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 미주에서는 대한인국민회가 미주일대 한인단체를 통합하여 건설, 군자금  모금, 만주에 지회를 설치하였습니다.
    • 일본에서는 동아동맹회, 학우회(합법적 친목단체), 조선학회(정치적인 계몽사업)가 활동하였습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의의와 한계

    독립운동의 공간을 나라 밖으로 확대시키고 독립전쟁론과 실력양성론을 결합하여 독립을 준비한 점에는 의의가 있으나 대한제국의 회복을 지향하는 복벽주의나 보황주의에서 완전히 탈피하지 못하여 계몽파와 무장파가 완전히 결합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1910년대의 독립운동

     

    3·1 운동의 배경

     

    3·1 운동은 1914년 1차 세계 대전과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강대국의 도움으로 곧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새로운 국제 질서의 형성으로 3·1 운동을 촉발시키는 중요한 외적 요인이 되었습니다.

    윌슨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원칙 14개 조 발표하였으며, 그중 그 민족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제창하였습니다. 하지만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대상은 전승국이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닌 패전국의 식민지, 또 전쟁에 기여한 일부 약소 민족에게만 국한된 것이었으므로 우리와는 무관한 것이었습니다. 레닌의 민족자결주의는 독립국가를 수립하는 것을 포함한 모든 민족의 자유로운 자결권 선고 및 약소 민족에 대한 독립운동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국외 곳곳에서도 독립선언을 발표하였는데, 김규식 등의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립의 정당성을 알리고 국제적 협조를 요청하였고, 파리에 파견된 대한인국민회, 상하이에서는 '대동단결 선언'을 통해 공화주의를 표방한 임시정부 수립을 제시하였습니다. 만주 길림에서는 무오독립선언을 통하여 외교독립론이 아닌 '전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여 만주의 군소독립단체를 단합시켜 무장항일투쟁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일본 도쿄의 한국인 유학생들이 조직한 조선독립청년단의 이름으로 2·8 독립선언과 결의문을 발표하고 시위를 벌였습니다.

     

     

    3·1 운동의 시기별 투쟁 형태의 전개

    3·1 운동 총 3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1. 1단계는 주요 도시에서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의 종교계 대표와 학생 대표들로 구성되어 2월 27일에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배포하고, 3월 1일에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가졌습니다. 민중의 독립 열망과 투쟁 역량을 모아 목적을 끝까지 관철시키는 것을 스스로 포기하고 지도력을 잃어버린 민족대표 33인은 그들만이 참가한 가운데 탑골공원 뒤편의 태화관이라는 식당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습니다.
    2. 2단계는 청년과 학생들이 중심으로 한 시위가 전국 도시로 확산되어 교사, 학생, 상인과 노동자들까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독립선언서 배포 및 비폭력주의를 외쳤습니다.
    3. 3단계는 농촌 및 산간벽지와 국외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토지조사사업으로 피해를 입은 농민들이 면사무소, 헌병 주재소, 친일 지주 등을 공격하는 무력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원래 내세웠던 비폭력주의의 원칙이 무너지고 무력적인 저항운동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국내뿐 아니라 만주, 연해주, 미주, 일본 등 국외에서까지 3·1 운동이 널리 확산되었습니다. 일제는 만세시위 군중에게 무차별하게 사격을 가하는 등 강력한 무력 진압과 경기도 화성 제암리에서 민간인을 무차별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하였습니다.

     

     

    3·1 운동의 의의

    3·1 운동은 민족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겠다는 생각과 자신감을 갖게 되면서 독립운동의 수준이 향상되었습니다. 지식인, 학생 중심에서 노동자, 농민의 참여가 더해지면서 독립운동의 참여 폭이 확대되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으로 독립운동을 보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발전시켰고, 일제의 식민통치 방식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실시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인도, 베트남, 필리핀, 이집트 등지의 세계 민족해방 운동사에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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