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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수립
    한국사 2024. 3. 9. 00:16

    조선에서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 즉 을미사변으로 인해 반일감정이 매우 높았으며,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습니다. 한편 고종은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었습니다.

     

    아관파천과 그 후 대한제국 수립까지 있었던 자주독립운동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아관파천

    아관파천은 이범진이 베베르와 공모하여 단행하였습니다. 그 후 친러 내각이 수립되고 김홍집과 어윤중이 민중에 의해 살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박정양, 이완용, 윤치호, 이범진 등을 중심으로 한 정동파 내각이 출범하자 일본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다른 나라의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해졌으며, 단발령 중지, 잡세 탕감, 을미의병의 해산을 권고하였습니다. 고종은 아관파천을 단행하게 되고 이후 열강의 내정간섭이 심화되면서, 당시 탁지부 고문이었던 알렉세예프는 실질적인 재무장관의 역할을 했었습니다. 

     

     

    독립협회의 등장 및 해산

    독립협회는 아관파천 이후 자주독립을 외치는 민중들의 여론이 거세어지면서 자주독립운동이 펼쳐지자, 1896년 서재필이 윤치호, 이상재 등 진보적 지신인과 서구의 근대적 사상과 개혁 사상을 가진 인사들과 함께 조직하였습니다. 도시의 상인과 농민, 광산 노동자, 여성이나 백정 등 해방된 천민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과거 청나라 상인들이 드나들던 영은문 자리에 독립문을 건립하고, <독립신문>을 편찬하여 열강의 내정간섭 및 절영도 조차와 일본의 석탄고 기지 반환 등 이권 요구를 저지하는 등의 자주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전제 군주제에 대해 반대하며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각급 학교 설립을 통한 신교육과 근대 산업의 개발을 주장하였으며,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나갈 수 있는 근대적인 국방력을 갖출 것을 주장하는 등의 자강혁신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을 확보하기 위해 생존권과 재산권을 보호하려는 자유민권운동으로 의회 설립을 주장하고 중추원 개편을 추진하였습니다. 국민참정권운동을 통해 국민의 자유와 평등 및 주권 확립을 추구하였습니다.

     

    퇴진한 보수파들은 독립협회가 공화정치를 기도한다 하여 무고한 간부 17명을 구속하고 독립협회에 해산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에 독립협회는 연일 만민공동회를 열어 정부의 조치에 강하게 항거하였으나, 정부는 보부상을 중심으로 한 궁중 수구파가 조직한 보수어용단체인 황국협회와 충돌하게 한 후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습니다.

     

     

    구국수호운동

    구국수호운동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에도 친일파 단체인 일진회에 대항하기 위해 헌정연구회와 같은 여러 개화자강 계열단체를 설립하면서 전개하였습니다. 1905년 이후에는 신민회, 대한자강회, 대한 협회 등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함으로써 사회의 발전 및 변화를 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구국수호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은 교육, 언론, 산업 등의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면서 실력을 양성하고자 하였습니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과 간섭으로 인해 애국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구국수호운동을 위한 다양한 운동이 민족 독립운동의 이념과 전략을 제시하고 장기적인 민족운동의 기틀을 마련한 것에는 의미가 있지만, 일본제국의 탄압과 지배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과오를 남겼습니다. 당시 일본제국의 정치와 군사적 종속 상태에서 전개된 운동이라 결과적으로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대한제국의 수립

    대한제국의 수립

     

    대한제국이 수립은 외세의 간섭을 막고 자주독립의 근대국가를 세우려는 국민들의 자각으로 고종의 환궁을 요구하는 여론의 고조와, 조선에서 러시아의 독점 세력을 견제하려는 국제적인 여론이 뒷받침되면서 진행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은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칭하고 자주국가임을 내외에 선포하였습니다. 고종은 1897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을 짓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였습니다. 태극기를 국기로 정하고, 애국가를 국가로 하였습니다. 

    청이 간도개간사업을 시작하면서 간도 이주민의 철수를 요구하자, 대한제국은 이중하를 토문감계사로 파견하여 간도는 우리의 영토라고 주장하였고,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하여 현지에서 포병을 양상하고 조세를 징수하여 1902년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구역으로 편입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울릉도 불법 침입과 산림벌채 문제를 일으키자, 울릉도를 군으로 편입하고 독도까지 관리하였습니다. 1905년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이 지령을 통해 독도가 대한제국의 영토임을 확인하였으나, 일본은 러일전쟁 중 불법적으로 독토를 강탈하여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대한제국의 광무개혁 추진과 내용

    광무개혁은 옛 제도를 근본으로 하고 새로운 제도를 참작한다는 구본신참의 이념을 바탕으로, 대한제국을 근대화하기 위함을 목표로 개혁이 전개되었습니다. 

    광무개혁은 전제군주제를 추구하여 의회 설립이나 입헌군주제의 정치적 요구를 탄압하였고, 법률과 칙령의 개정안을 마련하기 위해 황제 직속의 특별입법기구인 교정소를 설치하였습니다. <대한국국제>의 발표를 통해 황제의 전제권이 무한함을 강조하며 전제군주제를 더욱 강화하였습니다.

    양지아문 및 지계아문을 설치하고 근대적 토지 소유권을 인정한 지계를 발급하였으며, 근대적 공장과 회사를 설립하여 지방의 영세보부상을 지원하기 위해 상무사를 조직하였습니다. 실업교육을 강조하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하였으며, 각종 실업학교와 기술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화폐조례를 공포하여 금본위제를 시도하였습니다.

    1898년 군대를 증설하고 지휘관 양성을 위해 무관학교를 설립, 군주의 통수권을 칙령으로 반포하고 1899년에 원수부를 창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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