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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은 1984년에서 1985년도에 추진되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신분제 폐지와 토지 제도 개혁 등의 농민들의 혁신적인 개혁 요구 바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이후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침투가 심화하였습니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개화파가 조선으로 다시 돌아오면서 일본식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를 갑오개혁 또는 갑오경장이라고 합니다.
갑오개혁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차 갑오개혁과 김홍집 내각의 성립
1차 갑오개혁의 배경을 살펴보면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침투가 심화되자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농민들의 혁신적인 개혁을 하자, 이에 일본은 무력으로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하여 김홍집을 내각의 중심에 세웠습니다. 교정청을 폐지하고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모든 개혁안을 의결하면서 개혁을 추진하는 등 일본정의 내정개혁을 강요하였습니다.
1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청나라와의 종주적 관계를 청산하고 개국 연호 사용 및 자주적 회복을 표방하였습니다. 과거제를 폐지하고, 반상 및 문무의 구별 없이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경제적 개혁으로는 탁지아문에서 모든 세금과 관련된 사항을 관장하면서 재정을 일원화하였으며,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조세의 금납화를 실시하였으며 도량형을 개정하여 일본식으로 통일하였습니다. 사회적 개혁으로 신분제를 폐지하였으며, 고부의 재가 허용, 조혼 금지, 고문과 연좌제를 폐지하였습니다.
2차 갑오개혁과 김홍집과 박영효의 연립내각의 수립
2차 갑오개혁은 흥선대원군을 축출하고 박영효와 김홍집의 연립내각을 수립하여 1차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기구인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고종은 국정개혁의 기본 강령인 <홍범 14조>를 반포하였습니다.
홍범 14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홍범 14조>
1. 청에 의존하려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 전범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과 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3.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과 외척의 내정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4. 왕실사무와 국정사무를 나누어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5. 의정부 및 각 아문의 직무, 권한을 명백히 한다.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걷지 않는다.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의 관할에 속한다.
8. 솔선하여 절약하고, 이로써 각 이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9. 왕실과 관부의 1년 회계를 예정하여 제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1. 총명한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과 기예를 견습시킨다.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근본을 확립한다.
13. 민법과 형벌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활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2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으로는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치고 8아문 중 공무를 없애 7부로 개편하였으며, 지방 8도를 23부로 개편하고 각 부 아래 군을 설치하였습니다. 사법권과 행정권을 분리하고 지방관의 권한을 축소하여 군사권을 빼앗고 행정권만 갖도록 하였습니다.
2차 갑오개혁에 의해 학부아문이 설치되어 근대 교육제도가 마련되었으며, 정부는 근대 교육제도 확립을 위해 초등 교과서 <국민소학독본>을 제작하여 보급하였습니다. 고종의 교육입국조서 반포로 소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외국어 학교 등이 설립되었습니다.
3차 갑오개혁(을미개혁)
3차 갑오개혁의 배경을 살펴보면,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청나로부터 요동반도를 할양받기로 하였으나 프랑스와 독일 등의 간섭으로 요동반도를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조선은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민씨 세력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이 주도한 갑오개혁이 일시 중단되었습니다. 위기를 느낀 일본은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비상수단을 계획하였습니다. 이에 일본 공사였던 미우라가 중심이 되어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명성황후를 제거하고자 하였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본군은 군대와 낭인을 동원하여 궁중을 침범하고 명성황후를 시해하였습니다. 명성황후 사해사건(을미사변) 이후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3차 갑오개혁의 주요 목적은 을미사변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친일 세력을 만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3차 갑오개혁에서는 태양력을 사용하고 단발령을 시행하였으며, 우편 업무와 관련된 우체사를 전국에 설치하였습니다.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군제를 개편하였습니다.
갑오개혁의 의의와 한계
갑오개혁은 일본의 세력이 주도하는 수동적인 근대적 개혁이라는 한계점은 있지만,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는 의의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부의 자주 역량이 부족으로 인해 이를 주체적으로 실시할 수 없었고, 외세에만 의존하는가 하면 새로운 변화의 개혁을 저지하려는 기존 세력들의 반발로 실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서서히 민중들은 유교 사상의 전통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과 과학문명에 의한 지식을 새롭게 습득하면서 무지에서 벗어나려는 개화 및 계몽사상이 싹트기 시작하였다는 데에서 갑오개혁의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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