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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대 조선 중기의 변화
    한국사 2024. 3. 5. 00:25

    15세기말 지방의 사림세력이 정권에서 힘을 성장시키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림파는 반복되는 연산군의 실정에 반발하여 중종반정을 주도하였고, 이를 통해 중앙정계에 대거 진출하게 되면서 명종 때 훈구파를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사림은 서인과 동인으로 나누어 붕당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림파가 집권한 시기인 조선 중기의 변화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조선 중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

    훈구파는 고려 말에 조선의 건국을 주도한 급진파 사대부 출신으로 세조 집권에 공신한 세력입니다. 왕실과 혼인하여 세력을 키웠으며, 관학파 학풍을 계승하여 문물제도 정비에 기여하였습니다. 막대한 토지소유를 바탕으로 대지주로 성장하면서 15세기 이래 늘어난 농업 생산량과 상공업을 독점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서해 간척사업과 토지 매입을 통해 농장을 확대하였습니다. 대외무역 및 방납을 통해 경제적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고려 말의 온건 혁명파 사대부 출신으로 정몽주를 사람들이었던 사림은 성종 때 김종직의 등용을 시작으로 정계에 진출하였습니다.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왕도정치를 강조하였으며, 중소 지주적 배경을 바탕으로 영남과 기호 지방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향촌 자치를 강조하며 향촌에서 성리학적 향촌 질서 확립에 지역적 기반을 다져놓기도 했습니다.

    훈구 세력이 농장을 확대하면서 사림의 이익과 정치적 기반을 침해하자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4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들은 정권을 잃지 않고 유지하여 결국 훈구 세력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습니다.

    사림은 향촌의 교화를 위해 향약과 소학 등을 보급함으로써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켰으나, 덕망 높은 유학자를 가릴 목적으로 세워진 지방 사립 교육기관인 서원을 자기 당파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한 붕당의 기반으로 만들어버리는 폐단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조선의 붕당정치와 탕평책의 실시

    붕당정치

    붕당정치는 명종 때 정권을 장악한 사림과 새롭게 정치에 참여한 사림이 척신 세력의 척결을 두고 대립하였습니다. 기존 사림인 심의겸과 신진 사림인 김효원이 이조전랑직을 두고 대립하였는데, 김효원의 지지 세력은 동인, 심의겸의 지지 세력은 서인이었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각각 세력을 형성하여 붕당의 체계가 형성되었습니다. 서인은 온건하고 소극적인 반면 동인은 강경하고 적극적인 척신정치를  펼쳤습니다. 

    정여립의 모반으로 인해 동인에게 유리하던 정세가 서인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선조 24년 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을 논죄하는 고정에서 동인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북인이 의병항쟁을 주도하면서 광해군 때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이 형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하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정치적 패륜을 저지르자 이에 기회를 엿보던 서인이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옹립하게 됨으로써,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이 정치에서 쫓겨나고 서인과 남인 중심의 정국이 형성되었습니다. 서인과 남인은 각각 학파적 결속을 확고히 한 집단으로 서로를 학문적 입장에서 인정하는 가운데 상호비판적 공조체제를 이루었는데, 서인이 우위를 차지한 가운데 남인이 연합하는 도구였습니다.

    붕당 간의 경쟁 심화로 서로 자신의 당의 입장만 강조하는 과정에서 붕당 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왕권이 약화되었습니다.

     

    탕평책

    탕평책은 정치적 균형관계를 재정립할 목적으로 인사 관리를 통해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제도로써, 붕당 간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숙종 때 탕평론이 대두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의 결과로 왕위계승 문제와 왕세제의 대리청정 문제 등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의 혼란을 통일하자 무사 세력의 성장에 따른 국내 불만을 외부로 돌리고 대륙 진출에 발판을 마련하고자 조선을 침공하게 되면서 발생한 왜란이었습니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당시 조선의 왕이었던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난을 가야만 했고, 일본군은 평양과 함경도까지 북상하였습니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이 옥포, 사천, 당포, 한산도의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게 되면서 왜군의 보급로 차단과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사수하게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자기 지역의 지리에 맞는 전술과 전략으로 적에 맞선 싸운 의병들의 활약과 명나라 군의 협조로 임진왜란은 종결되었습니다.

    임진왜란의 결과 국토는 황폐해지고 인구가 급격히 감소했으며 문화재의 소실 및 신분제의 동요가 나타났습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전쟁 이후 피폐해진 국가 재정 수입 확보를 위해 토지대장 및 호적을 새롭게 정비하였고 성곽과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등 복구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쇠퇴해 가는 명나라와 강해진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표방하였습니다. 광해군과 그를 지지하는 북인의 중립외교정책에 반발을 일으킨 서인은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올렸습니다(인조반정). 인조는 서인의 주도로 친명배금 외교정책을 추진하였고 이에 불만은 품은 청나라는 2번에 걸쳐 조선을 침입하였는데, 이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 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 조선은 패하게 되고 청과 군신관계를 체결하고 명과는 단교하였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이후 청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에 송시열과 이완 등이 중심이 되어 북벌운동을 주도하였으나, 청의 국력 강화로 인해 실패하게 되고, 강대국으로 성장한 청을 현실적인 강국으로 인정하게 되면서 청의 발달된 문물을 수용해야 한다는 북학론의 입장이 대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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