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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개화파와 위정척사파한국사 2024. 3. 5. 23:11
조선 후기 개항 이전의 정세는 대내적으로 일당전제를 거부하고 특정 소수의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비정상적인 정치 형태인 세도정치로 인해 사회적 기반이 결여되고 붕당정치의 파탄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세도정치에 따라 정치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통치체제가 문란해지면서 전정, 군정, 환곡의 즉 삼정의 문란에 의한 민생의 파탄으로 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이에 왕권 강화책의 필요성이 증대되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서양 세력이 중국과 일본의 문호를 개방시키고 조선으로 몰려오는 상황에서 이양선의 출몰이 잦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럼 조선 후기개항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겠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와 의미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은 왕권 강화책과 민생 안정책으로 개혁정치를 펼쳤습니다.
당시 세도정치의 권력의 주축이었던 안동 김씨 일족을 축출하여 당파와 신분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하였습니다. 19세기 세도정치의 중심 기구 역할을 하고 있던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 및 격하시키고, 의정부(정치)와 삼군부(군사)의 기능을 부활하여 정치와 군사 업무를 분리하였습니다. <대전회통>, <육전조례>를 통해 통치체제를 정비하는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양반과 유생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 전국에 47개만 남기고 서원을 모두 정리하였습니다.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경복궁을 중건하고자 공사비 마련을 위해 원납전 징수와 당백전 남발로 경제적 혼란을 초래하여 양반과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민생 안정책으로는 양전사업을 실시하고 지방관의 토지 겸병 금지, 은결 색출의 전정을 개혁하였고, 호포제를 실시하여 군정의 개혁도 도모하였으며, 환곡제를 사창제로 개혁하여 부유한 자를 사창에 관장하게 하여 관의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개혁정치는 국가 기강을 확립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는 기여했다는 의의가 있으나, 전통 체제 내에서의 개혁정치라는 한계점이 있었습니다.
조선 후기 외세 침입에 대한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과 의미
당시 이양선의 잦은 출몰과 중국이 서구 열강에 의해 침입을 당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고, 천주교와 서양의 침입 및 문물이 들어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습니다. 고종 3년에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자행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프랑스 선교사 9명이 살해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가 7척의 함대를 끌고 강화도에 침입하여 병인양요(1866)가 일어났습니다. 한성근이 문수산성에서,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 군대와 맞서 싸워 프랑스 군이 퇴각하였습니다.
미국의 상선인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주변 지역을 약탈하고 방화를 자행하였는데, 이에 분노한 평양 군민들이 관군과 합세하여 배를 불태워버리는 사건(1866)이 발생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구실로 미국은 군함 5척을 이끌고 조선을 침입하여 신미양요(1871)가 일어났으나, 광성진과 갑곶 등에서 분전하여 미국의 침입을 막고 퇴각시켰습니다. 신미양요 이후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 거부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천명하였습니다.
이런 통상거부 정책은 우리나라의 자주성을 수호하고, 국가를 지켜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으나, 한편으로는 근대화를 지연시킨 한계를 가져왔습니다.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
흥선대원군이 물러나면서 민씨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자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이고 통상할 것을 주장하는 관리들이 대거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통상개화론자들이 주도가 되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이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문호 개방을 강요하였으며 1876년에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1882년에 미국과도 조미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미국고의 수교 후 다른 나라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에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층들이 중심이 되어 위정척사 사상이 전개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성리학적 사회 질서인 바른 것을 지키고, 서양 문물의 사약한 것과 이단을 물리치자는 입장에서 청에서 서양, 일본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임오군란의 배경과 결과
임오군란의 배경은 수구파와 개화파의 세력이 대립하던 시기에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와는 반대로 별기군에 대해서는 우대하는 것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구식 군인들에게 밀린 급료의 일부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배급하자 이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민겸호와 민태호의 집을 습격하고, 별기군의 일본군 장교를 사살하면서 임오군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고 명성황후를 축출하고 다시 흥선대원군을 재집권하게 하여 개화 이전의 상태로 관제 및 군제를 복구하였습니다. 도망간 명성황후가 청에 도움을 요청하고 일본이 개입할 것을 우려한 청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청의 군대는 군란을 진압하고, 흥선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몰아 청으로 압송하였습니다.
임오군란의 결과 청의 내정간섭은 점차 심화되었습니다. 청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였으며 재정 고문 및 외교 고문을 파견하였고, 청나라 상인의 통상특권을 허용하는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게 되었습니다.
일본 공사관 침입을 빌미로 일본은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군란 책임자 처벌, 조선 정부의 사죄와 배상금 지불을 요구하였으며 일본 공사관에 경비병 주둔을 허용하였습니다.
갑신정변의 배경과 결과
갑신정변은 1884년에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간섭이 심화되면서 민씨 정권 하의 급진개화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압박이 심해지자 청프전쟁에서 청나라가 조선에 주둔시킨 군대의 일부를 철수시키자 급진개화파는 일본 공사관과의 약속을 믿고 갑신정변을 계획하였습니다.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개화당 정부를 수집하여 <14개조 개혁 정강>을 반포하였습니다. 그러나 3일 만에 청군이 다시 개입하게 되고 일본의 배신으로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주도 세력 대부분은 일본으로 망명하거나 청군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갑신정변의 결과 일본과 한성조약을 체결하여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고 공사관 신축비를 부담하였습니다. 일본과 청은 톈진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청과 일본의 공동철병 및 군대 파견 시 사전 통보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청의 세력은 더욱더 강해지고 민씨 일파의 사대당이 권력을 독점하여 보수 세력이 장기 집권하게 되면서 개화세력은 도태하게 되고 개화 운동도 흐름이 끊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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