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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등장과 변화한국사 2024. 3. 13. 20:04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등장과 배경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 운동 이후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과 식민통치에 반대하여 국내외에서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정부수립의 필요성을 느낀 한국은 국내는 한성정부, 상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는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되었습니다. 이에 보다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독립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임시정부를 통합하게 되고 임시정부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나타났습니다. 연해주와 상해 측이 합의하여 상해정부가 한성정부 법통을 계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 통일 정부 수립 운동으로 대통령 중심제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공화제 정부를 수립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헌법을 제정하여 '대한민국'이라는 국호 아래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세우고 3권 분리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을 통해 국내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으며, 애국공채와 의연금을 통해 독립자극을 충당하고, 만주의 이륭양행과 부산의 백산상희 및 연통제, 교통국 조직 등을 통해 독립자극을 정부에 전달하였습니다.
외교독립운동으로 주파리위원부와 구미위원부를 두었고 군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업무를 관장하였습니다.
1920년대 임시정부의 침체
임시정부는 일제의 집요한 감시와 탄압으로 연통제 및 교통국 조직이 파괴되었고, 국내로부터의 지원이 감소하여 자금난 및 인력난이 가중되었습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진영 간에 이념이 대립되었습니다.
이승만이 '위임통치청원서'를 미국에 제출하면서 서북파와 기호파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으며, 1925년에 이승만이 하야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방향 전환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였으나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되면서 회의가 결렬되었습니다. 개조파는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상태에서 개혁을 통해 개선하자는 입장이었고, 창조파는 임시정부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국민대표회의를 통해 최고기관을 조직하자는 입장으로, 외교독립론을 비판하고 무장투쟁론을 주장하였습니다.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임시정부는 여러 독립운동단체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운영의 어려움 극복
임시정부의 분열 후 김구, 이시영, 이동녕 등 소수 독립운동가가 주도하여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 체제로 개편하였습니다. 김구는 1931년에 항일 무력단체인 한인애국단을 결성하였습니다. 한인애국단은 상하이에서 일본의 주요 인물을 암살할 목적을 가지고 결성한 독립운동단체였습니다.
일본 도쿄에서 1932년 1월 이봉창이 일왕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비록 히로히토 일왕을 암살하는 데는 실패하였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같은 해 2월 상하이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사령부의 출운호를 폭파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으나 폭파 과정의 미비로 실패하였습니다. 4월 윤봉길은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제의 천황 탄생 축하 및 상하이 사변 기념식에서 폭탄을 던졌습니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이슈가 되었는데 한국의 일본에 대한 반일투쟁이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장제스 등 중국 국민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윤봉길 의사는 12월에 격국 청살 당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이동과 대한민국 건국 강령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는 가운데 일제의 중국 침략과 상하이 점령으로 이동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상하이에서 항저우, 난징, 류저우, 구이양, 치장, 충칭으로 임시정부를 이동하였습니다.
충칭(중경) 시기의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의 지원으로 충칭에 청사를 마련하게 되고 정부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주석 중심제로 개헌하고 김구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체제를 확립하여 집행력을 강화하였습니다. 임시정부 주변의 3개 정당을 합당하여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습니다. 대한민국 건국 강령의 내용을 살펴보면 조국 광복을 염두에 두고 이념과 독립전쟁 준비 태세를 천명하였습니다. 건국이념으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실현하는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홍익인간을 바탕에 두었습니다. 부국 단계에서 건국 단계로까지 각 단계에서 해야 할 일을 명시하였습니다. 이 대한민국 건국 강령은 일본으로부터 독립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도 기여하였습니다. 민족주의 좌파인 김원봉의 조선혁명당을 임시정부로 받아들여 민족 통일전선을 형성하였습니다.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활동
한국광복군은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준군사조직이었습니다. 지청천을 중심으로 주요 간부 30여 명으로 창설하고, 1942년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일부를 편입하였습니다. 연합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고 태평양전쟁 직후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전투 외에 포로 심문, 암호 번역과 전단 작성, 대적 회유방송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일본 패망 전 국내 진입 계획을 세우고 자주독립 국가건설을 목표로 국내 진공작전을 계획을 펼쳤습니다.
한국광복군 출신의 주요 인물로는 이범석, 장준하, 김준엽, 안춘생 등이 있습니다. 이범석은 만주에서 신흥무관학교 등에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청산리에서 홍범도와 김좌진과 함께 전투를 이끌어 대승을 이루었습니다. 김준엽은 일제강점기 학도병으로 강제로 끌려갔다가 이후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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